손오공릴게임예시 ❡ R̗K͟T̂5̻4̀1͆.T͓O̼P̧ ㈃ 손오공게임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환우이빛 작성일25-12-26 17:21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
http://77.rgm734.top
2회 연결
-
http://21.vnu447.top
2회 연결
본문
【R̗K͟T̂5̻4̀1͆.T͓O̼P̧】
손오공릴게임예시 € R̗K͟T̂5̻4̀1͆.T͓O̼P̧ ┖ 손오공게임
손오공릴게임예시 ㎲ R̗K͟T̂5̻4̀1͆.T͓O̼P̧ ☈ 손오공게임
손오공릴게임예시 ▶ R̗K͟T̂5̻4̀1͆.T͓O̼P̧ ㉬ 손오공게임
손오공릴게임예시 ㎁ R̗K͟T̂5̻4̀1͆.T͓O̼P̧ ㎓ 손오공게임
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
[김삼웅 기자]
▲ 임경업장군 조선 인조 때 임경업장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세자를 구하러 중국으로 가던 중 연평도를 지날 때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쳐서 더는 나갈 수 없게 되자 가시나무를 그물처럼 엮어 조기를 잡아 먹인 것이 조기잡이의 시초로 되어 이때부터 서해에 조기잡이가 시작되었다.
ⓒ 바다이야기게임기 박태상
역사에는 글자 한 자, 문장 하나를 바꿔서 사람을 죽이고 정적을 제거한 사건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김부식이 시 한 구절과 관련하여 정지상을 주살하고, 유자광은 소년장군 남이의 '미평국(未 바다이야기슬롯 平國)'의 평(平)을 득(得)자로 바꿔 죽였으며, 간신들은 청 태종도 죽이지 못한 임경업의 '용천검(龍泉劍)'의 천(天)으로 고쳐 죽였다.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로, 역시 개혁정치가 정여립은 아들의 아호 '거점(去點)'이 빌미가 되어 역모로 몰아 죽였다.
정지상(?~1135)은 고려 문신으로 뛰어난 시인이자 정 릴게임신천지 치인이다. 5세 때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을(乙)자를 강물에 썼는고" 했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다. 그러나 큰 뜻을 펴보지 못한 채 묘청의 서경천도 사건에 연루되어 김부식에게 피살되었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시 한 구절에 얽힌 사연이 작용한다.
정지상은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젊어서 '사람을 보내며(送人)'라는 시 한 편을 지었다.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짙은 데그대 남포에 보내자니 슬픈 노래 울먹이네대동강물 어느 때에 마르리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니.
정지상의 이 시 중 마지막 절구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나"는 김부식이 욕심내는 절창이었다. 그래서 이 구 바다이야기게임기 절을 자기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김부식은 이에 앙심을 품고 사사건건 정지상을 적대시하였다.
김부식은 어느 봄날 고심을 거듭하여 시 한 절을 지었다.
버들 빛은 천 가지에 푸르고복숭아꽃 만 점이 붉구나.
이때 옆에 있던 정지상이, "누가 천 가지, 만 점을 세어보았다던가? 왜 버들 빛은 가지마다 푸르고, 복숭아 꽃 점마다 붉네라고 짓지 못하는가?"라고 핀잔하였다. 이래저래 자기보다 시문에 있어서 한 수 위인 정지상을 당대의 권력자 김부식은 끝내 포용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렇지만 김부식은 '시적(詩敵)'을 시샘하여 죽였을망정 위서를 통해 정적을 타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에서 남이 장군처럼 연소기예(年少氣銳)한 무장은 일찍이 없었다.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무인직을 역임하였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이어 서북변의 여진을 토벌한 공로로 이등군공을 받았으며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26세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니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빠른 출세를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로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으로 밀려났다.
남이는 여진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북정(北征)'이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시는 남이의 인물됨을 말해주거니와 후일 무고와 음해의 빌미가 되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네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한때 교과서에도 실려 어린 학생들까지 줄줄 외우던 시이다. 이 시의 내용을 전해들은 조정의 대신들은 기개 높은 인재를 해치우고자 음모를 꾸몄다. 병조참의 유자광 일파가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未平國)"의 평(平) 자를 득(得) 자로 바꿔 반역을 꿈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 속에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의 등장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엿들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였다. 남이는 결국 간신들의 모함으로 국문 끝에 능지처사를 당하고 많은 측근 무사들도 역모로 몰려 처형되었다.
임경업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대장군의 기개를 갖춘 우국충정의 충신이오, 무장이었다. 문무를 겸한 빼어난 장수였지만 청군과 변변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 불운한 군인이었다.
광해군 때 아우와 함께 무과에 급제한 뒤 이괄의 난 때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라도 낙안군수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무찌르고자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지만 이미 강화가 성립되어 다시 임지로 회군해야 했다.
임경업은 어렸을 때부터 대장부의 담력과 패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늘 한숨을 지으며 "내가 천지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는데 물건이 아니 되고 사람이 됐으며 계집이 아니 되고 사내가 되었는데, 이 조그마한 나라에 나서 기운을 펴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게 되어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했다고 전한다.
임 장군의 패기와 위엄이 이러하매 조정 대신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군사 2만 명만 주면 청나라 수도 심양을 곧장 공격하여 함락시키겠다는 소청에 임금 이하 대신들이 벌벌 떨며 "많은 군사를 국경 방면에 있는 장수에게 보내줄 수 없다"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이를 묵살하였다. 외적의 침략으로 수모를 당할지언정 제 나라의 잘난 장수가 승리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지배자들의 처신이었다.
임경업은 보통의 무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의 칼에는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석자가 되는 용천검에 만 권 되는 책이로다하늘아 나 냈으니 그 뜻이 무엇이더냐산동에 재상나고 산서에 장수난다너희가 대장부라면 나도 대장부이다.
그런데 이 글이 엉뚱하게 역모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임경업은 자신의 삼척검이 '용천(龍泉)'에서 난 것으로 호기를 부렸는데 간신배 유자광 일파는 '천(泉)'을 천(天)자로 고쳐 마치 '하늘이 낸 용'인 것처럼 날조한 것이다.
임경업을 사지로 몰아간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청나라의 속국이 된 나라를 구하고자 명나라와 내통해 청에 대항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명나라에 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륙의 정세가 갈수록 명나라에 불리해지면서 청국이 명나라 남경을 함락했다.
임경업은 탈출을 시도하던 중 그의 부하였던 한사립의 밀고로 붙잡혀 청국의 북경에 압송되었다. 임경업을 직접 취조한 청 태종은 그의 당당한 모습과 충심(忠心)을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임 장군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 본국의 대신들은 적국보다 더 배가 아팠다. 김자점 일파는 임경업이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송환해 줄 것을 청국 정부에 간청했다. 서울로 송환된 임경업은 혹독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임경업은 숨을 거두면서 "천하 일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나를 죽여서 되느냐"고 탄식하였지만, 간신들에게 그의 뜻이 전해질 리 없었다. 적장도 죽이지 않았던 충의의 장군을 글자를 고치고 역모로 몰아서 죽였다.
김자점은 충직한 군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장룽(長陵)의 지문(誌文)을 청나라에 보내 다시 국난을 불러일으켰던 간신이자 역적이었다.
조선 중종시대 조광조는 부제학, 대사헌 등을 지내면서 유교 정치의 이상인 지치주의(至治主義,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상)를 기본으로 하는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보수 세력에 밀려 37세의 젊은 나이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척신들의 부패의 본산인 소격서(일월성신 등 도교의 신들에게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관청)를 혁파하고 어진 선비를 뽑는 현량과를 설치해 개혁적 인물들을 홍문관, 사간원 등 요직에 배치하였다. 양풍미속을 양양하기 위해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실시케 하며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여러 서적을 번역, 인쇄하여 널리 배포하는 등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중종반정 때 큰 공도 없이 공신 칭호를 받은 자들을 훈록에서 삭제토록 하는 등 국가의 기강 확립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정책은 수구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사림의 주장으로 공신록에서 삭제당한 심정과 소인배로 지목당한 남곤이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나섰다. 여기에 사림의 탄핵을 받아 밀려난 홍경주가 가세하였다. 홍경주의 딸은 임금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조광조를 음해하였다. 특히 홍경주의 딸, 홍희빈은 궁녀를 시켜 금원(禁苑)에 있는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네 글자를 써놓게 하였다. 벌레가 잎에 묻은 꿀물을 갉아 먹자 "주초위왕"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이 나뭇잎을 임금에게 바쳤다. 결국 기묘사화가 벌어져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세력들은 죽임을 당했다.
정여립처럼 사후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죽음의 배경을 놓고 분석이 엇갈리는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반역 죄인이냐 아니면 무고의 희생자였으냐를 놓고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성격이 포악한 자였다는 평가에서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논란 속에 휩싸여 있는 정여립은 조선 최대의 모략극의 희생자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아무튼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정여립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동인의 주요 인사들이 제거되며 1천여 명에 달하는 사대부들이 희생되는 이른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는 조선의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합친 숫자에 비교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옥사로 인해 전라도는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 지방과 함께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이 어렵게 되었다. 기축옥사는 지역차별의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정여립이 속한 동인들을 타도할 기회를 노리던 서인들은 정여립의 범상치 않은 행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가 모반을 위한 무력 양성 조직이라고 고변했다. 아울러 몇 가지 그와 관련되었다는 참설을 거론하며 그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서인들이 내세운 참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초 이래로 전해온 "목자망(木子亡) 정읍흥(鄭邑興)" 즉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참설을 정여립이 요승 의연과 모의하여 이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숨겨두고, 산놀이를 방지하여 지리산에 가서 옥판을 찾아 무리들에게 보였다.
둘째, 승려 의연이 왕기가 전주(정여립의 근거지였다) 동구 밖에 있다고 꾸며 전주 왕기설(王氣說)을 퍼뜨렸다.
셋째,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면 그 집 주인이 왕이 된다"는 동요가 있는데 정여립이 의연과 몰래 정여립의 정원에 있는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갈기를 끼워두었다가 뽕나무 껍질이 서로 붙게 되자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의 호를 "거점(去點)"이라 하여 이는 옥(玉)자에서 점을 지우면 왕(王)이 된다는 뜻으로 역모가 틀림없다는 혐의까지 씌웠다.
동인세력 타도를 노리던 서인들은 서인세력의 대부 정철의 주도에 따라 황해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인 등이 정여립의 고변을 상주하였다. 이에 소식을 전해들은 정여립은 이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을 놓고, 음모가들이 호를 엉뚱하게 거점(去點)이라 위서해 정여립을 제거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임경업장군 조선 인조 때 임경업장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는 세자를 구하러 중국으로 가던 중 연평도를 지날 때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쳐서 더는 나갈 수 없게 되자 가시나무를 그물처럼 엮어 조기를 잡아 먹인 것이 조기잡이의 시초로 되어 이때부터 서해에 조기잡이가 시작되었다.
ⓒ 바다이야기게임기 박태상
역사에는 글자 한 자, 문장 하나를 바꿔서 사람을 죽이고 정적을 제거한 사건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김부식이 시 한 구절과 관련하여 정지상을 주살하고, 유자광은 소년장군 남이의 '미평국(未 바다이야기슬롯 平國)'의 평(平)을 득(得)자로 바꿔 죽였으며, 간신들은 청 태종도 죽이지 못한 임경업의 '용천검(龍泉劍)'의 천(天)으로 고쳐 죽였다.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로, 역시 개혁정치가 정여립은 아들의 아호 '거점(去點)'이 빌미가 되어 역모로 몰아 죽였다.
정지상(?~1135)은 고려 문신으로 뛰어난 시인이자 정 릴게임신천지 치인이다. 5세 때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을(乙)자를 강물에 썼는고" 했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다. 그러나 큰 뜻을 펴보지 못한 채 묘청의 서경천도 사건에 연루되어 김부식에게 피살되었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시 한 구절에 얽힌 사연이 작용한다.
정지상은 체리마스터pc용다운로드 젊어서 '사람을 보내며(送人)'라는 시 한 편을 지었다.
비 개인 긴 언덕에는 풀빛이 짙은 데그대 남포에 보내자니 슬픈 노래 울먹이네대동강물 어느 때에 마르리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니.
정지상의 이 시 중 마지막 절구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나"는 김부식이 욕심내는 절창이었다. 그래서 이 구 바다이야기게임기 절을 자기에게 넘겨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김부식은 이에 앙심을 품고 사사건건 정지상을 적대시하였다.
김부식은 어느 봄날 고심을 거듭하여 시 한 절을 지었다.
버들 빛은 천 가지에 푸르고복숭아꽃 만 점이 붉구나.
이때 옆에 있던 정지상이, "누가 천 가지, 만 점을 세어보았다던가? 왜 버들 빛은 가지마다 푸르고, 복숭아 꽃 점마다 붉네라고 짓지 못하는가?"라고 핀잔하였다. 이래저래 자기보다 시문에 있어서 한 수 위인 정지상을 당대의 권력자 김부식은 끝내 포용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렇지만 김부식은 '시적(詩敵)'을 시샘하여 죽였을망정 위서를 통해 정적을 타도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에서 남이 장군처럼 연소기예(年少氣銳)한 무장은 일찍이 없었다. 태종의 외손자인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무인직을 역임하였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이어 서북변의 여진을 토벌한 공로로 이등군공을 받았으며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26세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니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빠른 출세를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로 병조판서에서 해직되어 겸사복장으로 밀려났다.
남이는 여진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북정(北征)'이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이 시는 남이의 인물됨을 말해주거니와 후일 무고와 음해의 빌미가 되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네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한때 교과서에도 실려 어린 학생들까지 줄줄 외우던 시이다. 이 시의 내용을 전해들은 조정의 대신들은 기개 높은 인재를 해치우고자 음모를 꾸몄다. 병조참의 유자광 일파가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未平國)"의 평(平) 자를 득(得) 자로 바꿔 반역을 꿈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 속에 숙직을 하고 있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의 등장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엿들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였다. 남이는 결국 간신들의 모함으로 국문 끝에 능지처사를 당하고 많은 측근 무사들도 역모로 몰려 처형되었다.
임경업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대장군의 기개를 갖춘 우국충정의 충신이오, 무장이었다. 문무를 겸한 빼어난 장수였지만 청군과 변변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 불운한 군인이었다.
광해군 때 아우와 함께 무과에 급제한 뒤 이괄의 난 때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라도 낙안군수로 있을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청군을 무찌르고자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지만 이미 강화가 성립되어 다시 임지로 회군해야 했다.
임경업은 어렸을 때부터 대장부의 담력과 패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늘 한숨을 지으며 "내가 천지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는데 물건이 아니 되고 사람이 됐으며 계집이 아니 되고 사내가 되었는데, 이 조그마한 나라에 나서 기운을 펴보지 못하고 일생을 보내게 되어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했다고 전한다.
임 장군의 패기와 위엄이 이러하매 조정 대신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군사 2만 명만 주면 청나라 수도 심양을 곧장 공격하여 함락시키겠다는 소청에 임금 이하 대신들이 벌벌 떨며 "많은 군사를 국경 방면에 있는 장수에게 보내줄 수 없다"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이를 묵살하였다. 외적의 침략으로 수모를 당할지언정 제 나라의 잘난 장수가 승리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지배자들의 처신이었다.
임경업은 보통의 무장과는 크게 달랐다. 그의 칼에는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석자가 되는 용천검에 만 권 되는 책이로다하늘아 나 냈으니 그 뜻이 무엇이더냐산동에 재상나고 산서에 장수난다너희가 대장부라면 나도 대장부이다.
그런데 이 글이 엉뚱하게 역모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임경업은 자신의 삼척검이 '용천(龍泉)'에서 난 것으로 호기를 부렸는데 간신배 유자광 일파는 '천(泉)'을 천(天)자로 고쳐 마치 '하늘이 낸 용'인 것처럼 날조한 것이다.
임경업을 사지로 몰아간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청나라의 속국이 된 나라를 구하고자 명나라와 내통해 청에 대항하였는데 일이 탄로 나는 바람에 명나라에 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륙의 정세가 갈수록 명나라에 불리해지면서 청국이 명나라 남경을 함락했다.
임경업은 탈출을 시도하던 중 그의 부하였던 한사립의 밀고로 붙잡혀 청국의 북경에 압송되었다. 임경업을 직접 취조한 청 태종은 그의 당당한 모습과 충심(忠心)을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임 장군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 본국의 대신들은 적국보다 더 배가 아팠다. 김자점 일파는 임경업이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으므로 송환해 줄 것을 청국 정부에 간청했다. 서울로 송환된 임경업은 혹독한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임경업은 숨을 거두면서 "천하 일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나를 죽여서 되느냐"고 탄식하였지만, 간신들에게 그의 뜻이 전해질 리 없었다. 적장도 죽이지 않았던 충의의 장군을 글자를 고치고 역모로 몰아서 죽였다.
김자점은 충직한 군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장룽(長陵)의 지문(誌文)을 청나라에 보내 다시 국난을 불러일으켰던 간신이자 역적이었다.
조선 중종시대 조광조는 부제학, 대사헌 등을 지내면서 유교 정치의 이상인 지치주의(至治主義,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상)를 기본으로 하는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보수 세력에 밀려 37세의 젊은 나이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척신들의 부패의 본산인 소격서(일월성신 등 도교의 신들에게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관청)를 혁파하고 어진 선비를 뽑는 현량과를 설치해 개혁적 인물들을 홍문관, 사간원 등 요직에 배치하였다. 양풍미속을 양양하기 위해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실시케 하며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여러 서적을 번역, 인쇄하여 널리 배포하는 등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중종반정 때 큰 공도 없이 공신 칭호를 받은 자들을 훈록에서 삭제토록 하는 등 국가의 기강 확립에도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 정책은 수구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사림의 주장으로 공신록에서 삭제당한 심정과 소인배로 지목당한 남곤이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나섰다. 여기에 사림의 탄핵을 받아 밀려난 홍경주가 가세하였다. 홍경주의 딸은 임금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 조광조를 음해하였다. 특히 홍경주의 딸, 홍희빈은 궁녀를 시켜 금원(禁苑)에 있는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네 글자를 써놓게 하였다. 벌레가 잎에 묻은 꿀물을 갉아 먹자 "주초위왕"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이 나뭇잎을 임금에게 바쳤다. 결국 기묘사화가 벌어져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세력들은 죽임을 당했다.
정여립처럼 사후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죽음의 배경을 놓고 분석이 엇갈리는 인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반역 죄인이냐 아니면 무고의 희생자였으냐를 놓고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성격이 포악한 자였다는 평가에서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논란 속에 휩싸여 있는 정여립은 조선 최대의 모략극의 희생자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아무튼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정여립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동인의 주요 인사들이 제거되며 1천여 명에 달하는 사대부들이 희생되는 이른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는 조선의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합친 숫자에 비교될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옥사로 인해 전라도는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 지방과 함께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고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이 어렵게 되었다. 기축옥사는 지역차별의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정여립이 속한 동인들을 타도할 기회를 노리던 서인들은 정여립의 범상치 않은 행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가 모반을 위한 무력 양성 조직이라고 고변했다. 아울러 몇 가지 그와 관련되었다는 참설을 거론하며 그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서인들이 내세운 참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초 이래로 전해온 "목자망(木子亡) 정읍흥(鄭邑興)" 즉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참설을 정여립이 요승 의연과 모의하여 이를 옥판에 새겨서 지리산 석굴에 숨겨두고, 산놀이를 방지하여 지리산에 가서 옥판을 찾아 무리들에게 보였다.
둘째, 승려 의연이 왕기가 전주(정여립의 근거지였다) 동구 밖에 있다고 꾸며 전주 왕기설(王氣說)을 퍼뜨렸다.
셋째, "뽕나무에 말갈기가 나면 그 집 주인이 왕이 된다"는 동요가 있는데 정여립이 의연과 몰래 정여립의 정원에 있는 뽕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갈기를 끼워두었다가 뽕나무 껍질이 서로 붙게 되자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누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의 호를 "거점(去點)"이라 하여 이는 옥(玉)자에서 점을 지우면 왕(王)이 된다는 뜻으로 역모가 틀림없다는 혐의까지 씌웠다.
동인세력 타도를 노리던 서인들은 서인세력의 대부 정철의 주도에 따라 황해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인 등이 정여립의 고변을 상주하였다. 이에 소식을 전해들은 정여립은 이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을 놓고, 음모가들이 호를 엉뚱하게 거점(去點)이라 위서해 정여립을 제거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